국모명성황후

개항

개항

고종과 순종 1890 이미지 대원군이 물러난 뒤 조정은 새롭게 개편되었다. 영의정에 이유원(李裕元),좌의정에 흥인군 이최응(李最應),우의정에 박규수(朴珪壽)가 임명되고 조두순(趙斗淳)이 원훈의 예우를 받는가 하면 조영하,김병국 등이 중용되었다. 명성황후의 의중은 곁에 있던 민승호와 민규호가 대행했다. 하루아침 에 권력을 잃은 대원군측의 반발이 없을 수 없었다, 1873년 12월 19일 경복궁 순희당(純熙當)에서 불이 일어나 자경전(慈慶殿) 32칸을 비롯하여 자미당(紫薇當) 38칸,교태전(交泰殿) 36칸 등 도합 3백64칸을 태웠다. 운현궁에 출입하던 하인의 소행이라는 풍설이 떠돌았다. 1874년 11월 28일 감고당에서 죽동으로 옮겨와 살고 있었던 민승호의 집에 외읍의 수령이 서한과 함께 작은 봉물함을 보내왔는데 안방에서 봉물함을 여는 순간 폭발하여 명성황후의 생모인 한창 부부인 이씨, 민승호, 그의 아들 매지등 모·자·손 3대가 폭사하고 말았다. 서한에는 「진기한 물건이오니 타인의 이목을 피하여 대감이 손수 개봉해 주시기 바란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한다. 다음해 11월에는 영의정 이최응의 집에서도 방화사건이 발생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배후 조종자로 대원군이 지목되었다. 대원군의 세력을 몰아내려는 명성황후의 집념은 대단 하였다. 대원군과 가까운 즉 운변인물(雲邊人物)이라면 중앙정계는 물론 운현궁의 사인과 지방의 수령 방백들 까지 파직 또는 유배형을 내렸다.

첫 아들을 잃은 명성황후는 1873년 1월에 딸을 낳았으나 이공주도 곧 죽고 말았다.1874년(고종11) 2월 8일 다시 왕자가 태어나니 이 아이가 순종(1874~1926)으로 조선왕조의 마지막 임금이 되는 것이다. 나이 순서에 의해 귀인 이씨(완화군을 낳고 궁인 이씨는 귀인이 되었다)의 소생인 완화군이 세자로 책봉되지 않을까 하여 조급해 하던 명성황후는 이유원을 주청정사로 삼아 북경에 보내는 한편 부산에 와있던 일본관리 하나부사(化房義質)를 통해 국교회복을 조건으로 왕세자 책봉교섭을 시도케하여 청나라의 승인을 얻어냈다. 일본에 대한 조선의 태도가 부드러워지자 일본은 조선과의 근대적인 외교관계 수립에 적극성을 띠고 나섰다. 임진왜란 이후 2백여년 동안 조선과 일본은 서로 경조사가 있으면 경하와 조위하는 것이 상례였다. 국내의 중대한 변혁이 있으면 통고해 주는 것 역시 예로 되어 있었다. 이러던 것이 대원군의 척왜정책으로 외교관계가 악화 되어 있었다. 명치유신 이후 일본은 만국공법에 의한 외교로 나왔고 조선은 종래의 교린정책으로 일본을 대하고자 하였다. 이 미묘한 시기에 고종은 시원임대신(時原任大臣)에게 수차에 걸쳐 하문하였으나 대일외교의 묘안을 찾지 못하자 다시 강경으로 선회했다. 그러자 일본은 교섭의 빠른 해결을 보기 위해 운요호(雲楊號)등 3척의 군함을 동원 위협을 가하면서 미리 계획된 도발을 감행했다.1875년(고종12) 8월 운요호가 강화도 초지진(草芝鎭)에 접근하자 포대의 수병들이 발포하게 되었고 기다렸다는 듯이 반격에 나선 일본해군이 초지진과 영종진(永宗鎭)을 포격하는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 대포의 사정거리는 약 7백미터 정도로 운요호가 있는 곳까지 다다르지 못했으나 일본이 영국에서 구입한 운요호는 2백 45톤급으로 근대적인 장비를 갖춘 포함이었다. 이 전투에서 조선은 전사 35명, 포로 16명, 대포36문, 화승총 1백30여정 등을 약탈당하는 피해를 입었으나 일본은 경상자 2명뿐이었다.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 일본은 교묘히 그 책임을 조선에 떠넘기면서 정치 외교의 중대한 문제로 비화시켰다. 일본은 우선 조선 진출에 대한 청국의 방해를 막기 위해 조선이 청나라와 종속관계에 있음을 이유로 운요호 사건에 대한 책임을 먼저 청나라에게 물었다. 구미 열강에 시달리고 있던 청나라는 문제가 확대될 것을 우려하여 조선이 일본과 조약을 맺을 것을 권유했다.
1876년(고종13) 1월 판중추부사 신헌(申櫶)과 일본 전권대사 구로다가 강화부 연무당에서 담판을 계속하는 동안 조정은 의견만 분분할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운현궁으로 돌아와 있던 대원군, 유배가 풀린 위정척사론자 최익현 등의 척화론과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국제정세에 다소의 이해를 가지고 있던 박규수, 오경석 등의 개국론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던 것이다. 때마침 세자책봉 주청사로 청국에 갔던 이유원이 청나라 이홍장(李鴻章)이 보낸 「개국함이 유리하다」는 취지의 서한을 가지고 돌아오자 급진전하로 개국을 결정했다. 최익현은 도끼를 들고 광화문 앞에 엎드려 일본과의 강화를 반대하는 5난망(五亂亡)의 상소문을 올렸다. 이로인해 고종의 분노를 산 최익현은 다시 흑산도로 유배를 당하는데 유배지로 떠나기 직전인 1876년 2월3일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병자수호조약)가 체결 되었다.조약은 12개 조문으로 이루어졌다. 제1관에서 조선은 자주국으로 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라고 했다. 이것은 일본이 조선을 청나라에서 분리 시켜 앞으로의 침략에 유리한 지위를 갖겠다는 복선이었다. 제4관과 5관에는 부산항 이외의 두 개의 항구를 일본상인에게 열고 조계지를 만들 수 있도록 했다. 제 10관 에는 양국민의 범죄는 각각 그 나라의 법에 의해 처단 한다는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조항을 넣었다. 이 조항으로 인해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관여했던 일본인은 부당하게 비호 받게 된다. 7월6일에는 수호조규부록 11관과 무역규칙 11칙이 합의 되었다. 부록과 규칙의 내용은 대부분 일본측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한 일방적인 것이었는데, 특히 일본화폐 사용과 양국간 수출입세 면제의 합의는 조선외교의 무지를 단적으로 드러낸 결과였다. 1877년 부산에 일본 조계지가 설정되고 1879년 원산,1882년 5월 22일 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이어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과 통상조약을 맺었다. 은둔국 조선은 이렇게 세계를 향해 열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