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상설

명성황후 어찰(御札)

명성황후 어찰(御札)

명성황후의 서찰 20장을 한 데 묶어 제책한 것으로 이모(한산이씨)가 보낸 서찰에 대한 답장이다. 이 서찰은 명성황후의 부드럽고 정겨운 면과 냉철한 면의 두 성품이 잘 드러나 있다.
명성황후 구국이념(이이제이)

명성황후 구국이념(이이제이)

[외세의 침략은 외세의 힘을 이용해서 막는다] 명성황후의 구국이념인 이이제이 사상 - 서구 열강과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침략하던 시기에 나라의 근본인 백성이 굳건해야 나라가 편안할 수 있다고 믿었던 명성황후는 뛰어난 인재를 고루 등용했으며, 외교적으로는 외국의 침략 세력끼리 서로 견제하고 싸우게 하는 ‘이이제이’론을 펼쳐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였다.
아! 옥호루

아! 옥호루

조선 26대 왕인 고종 32년(1895) 10월 8일! 옥(玉)으로 만든 항아리 같이 생겼다 해서 이름 붙여진 경복궁 내 옥호루에서 전대미문의 국모 시해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우의 지휘 아래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그 시신을 불에 태운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명성황후 국장(國裝)

명성황후 국장(國裝)

일제는 10월 8일에 명성황후를 난자시해하고 시신은 궁궐밖으로 운반 소각해 버렸다. 그 뒤 일제의 강압으로 폐위되어 서인(庶人)까지 되었다가 광무 일년에 복호(復號)되었으며 1897년에 명성(明成)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그 해 11월 국장으로 청량리 홍릉으로 옮겨져 조성되었다가 후에 고종과 함께 현 위치인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이장하여 자리 잡았다.
시해도

시해도

1895년 양력 10월 8일 새벽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두 번째 칼을 휘둘러 명성황후를 절명케 한 칼로서 길이는 1m 20cm 로 성인이 한 손으로 휘두르기에 힘겨울 정도로 무겁고 아직도 날이 시퍼런 살상용 칼이다. 칼집에는 [一瞬電光剌老狐](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 여우를 베었다) 라는 섬뜩한 글이 적혀 있으며 작전명을 [여우사냥]이라고 붙였음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명성황후 어보

명성황후 어보

왕비 어보는 시호나 존호, 묘호를 내릴 때마다 어보를 새겨놓고 실제는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며, 종묘에 보관하였었으나 현재는 역대 왕과 왕비 어보는 궁중 유물관에 보관하고 있고, 명성황후 어보는 총 10개가 있다.
고종어첩

고종어첩

고종이 1885년 정월 보름날 이범진에게 내린 [천운] 이란 어첩
지휘도

지휘도

명성황후 당숙이신 민치일이 1887년 호서수군방어사 당시 사용하였던 지휘용 칼 (1880년)